5월25일 토요일,
간송미술관에서
<표암(豹菴)과 조선남종화파전(朝鮮南宗畵派展)>을 보고,
성북구립미술관 앞을 지나게되었는데
마침 <소전 손재형>전 을 하고있었다.
손재형(孫在馨)은 전부터 관심이 있었기에 반가웠다.
소전 손재형 전(展)에는
그의 서예와 문인화 작품, 전각, 자료 등 총 26점이 전시되었는데,
입구에서 나눠주는 안내설명서가 친절하여 매우 편했다.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3~1981)은
전남 진도에서 출생, 1924년 21세때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후
연속 수상으로 서예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소전은, 중국에서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로 부르던 것을, 서예(書藝)로 정착시켰으며,
추사체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서체인 소전체(素筌體)를 창안하였다.
그는 서예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로서
문화재와 전통건축에도 조예가 깊어,
손재형, 공검지기(恭儉持己,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몸가짐을 삼도록 함)
해방후 소전은 한글서예운동를 이끌었으며,
소전의 한글서체 창작은 한국서예사에 기록될 획기적인 업적에 속한다.
대중과 친숙한 잡지 ‘샘터’ '바둑’ '현대문학' 등의 제호가 바로 소전의 글씨며,
1970년대 국정교과서 표지에 적혀있는 '국어' '수학' 등의 과목이름도 그의 글씨다.
손재형, 제자(題字) 자료
손재형. 청풍고절(淸風高節), 1950, 33x47cm
손재형, 승설암도(勝雪盦圖), 1945, 23×35cm
<< 1945년 음력 3월 청명절, 서울 성북동 승설암(勝雪盦)에
소설가 상허 이태준, 서양화가 수화 김환기, 동양화가 심원 조중현, 서예가 소전 손재형 등
당대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널찍한 땅에 자리한 승설암은 백양당출판사 주인 배정국의 집으로
수많은 책들이 들어찬 사랑채, 멋진 정원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이날 소전은 상허의 요청을 받고 흙담 아래 수석이 놓인 고즈넉한 마당을 즉석에서 그려낸다.
깔깔한 붓끝과 간결한 구도로 완성한 소박한 풍경에 짙은 문기, 탈속의 경지가 스며 있다.
자연과 지성의 만남을 담은 ‘승설암도(勝雪盦圖)’를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찾아왔다.>>
(동아일보 기사 2013,4/23)
2003년 소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진도에 소전미술관이 개관하였다.
사진 : 두산백과사전에서.
소전(素筌)은 수많은 국보급 그림들을 모았는데,
1844년 완당(阮堂) 나이 59세, 제주도에 유배온지 5년이 되었을 때.
완당(阮堂)은 이미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때 완당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중국에 다녀오며 귀한 책자를 구해 완당에게 선물하니,
완당이 감격에 겨워, 이상적이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 세한도(歲寒圖)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4~1865)은
대대로 역관인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 역관이 되었는데,
모두 12차례나 연경에 다녀온 중국통으로, 완당의 제자였다.
그는 중국의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학식과 서문에 능했다.
완당이 세한도(歲寒圖) 발문에서,
논어 자한편의 글을 언급한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
........
.........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서
소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도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그리고 그림 오른쪽 하단, 도장에 찍혀 새겨진 글,
`長毋相忘(장무상망)`...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23.3×108.3cm>
이상적이 세한도(歲寒圖)를 가지고 연경에 가서 천하의 문장들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들이 모두 추사를 흠모하며 발문을 쓰니,
16명의 글이 더해져서 세한도(歲寒圖)는 길이가 14미터에 달하게된다.
세한도(歲寒圖)는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후 훗날 평안감사를 지내고 휘문고등학교를 설립한 민영휘에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 민규식이 완당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팔아넘긴다.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 는,
일제시대 추사연구를 개척한 인물로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로 서울에 부임하여.
추사 김정희에 대한 매력에 빠져들면서 그에 대한 연구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중국과 한국에서 추사관련 자료를 수집. 추사의 서간 700여통과 관련서적 수천권을 수집하였고
1936년 동경대에서 ‘조선조에서 청조 문화의 이입(移入)과 김완당’이라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이 논문에서 추사를 "청조 고증학연구의 제 1인자"로 일컬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손재형은 후지즈카가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갈까봐
그를 찾아가서 원하는 값을 모두 쳐드리겠다며 <세한도>를 양도해줄 것을 청하나,
후지즈카는 자신이 완당을 존경하며 그림을 고이 간직하겠다고 거절한다.
1944년 여름, 태평양전쟁 말기 후지츠카도
다른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패전 뒤를 생각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손재형은 도쿄, 후지츠카의 집에까지 찾아가서 <세한도>를 달라고 졸라대는데,
두달간 매일 찾아간다.
이에 감복한 후지츠카가,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넘겨주라고 했으니,
손재형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한다.
그러나 손재형은 나중까지 못 기다리겠으니 당장 <세한도>를 달라고 계속 고집을 피우고,
드디어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이는 바로 손재형이라며
<세한도>를 넘겨주는데,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며 무상으로 넘겨준다.
이야기가 극적으로 흘러가느라 그랬는지,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지고 귀국한지 석달쯤 지난 1945년 3월10일,
후지츠카의 서재와 연구실이 폭격을 맞아 모든 자료가 불타버리고말았으니,
손재형의 덕으로, <세한도>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시 또 거론해야겠다.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한국에 돌아온 <세한도>에,
정인보, 오세창, 이시영이 발문을 추가로 더 쓴다.
그러나 훗날,
손재형이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선거자금에 쪼들리게되자
그의 수장품 중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양도하고,
<세한도>는 후지츠카의 뜻을 생각해서 차마 팔 수 없어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저당잡히고 돈을 끌어쓴다.
그러나 국회의원에 떨어지고 돈도 없어 <세한도>를 찾아오지 못하게되니,
이후 이근태가 <세한도>를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팔아넘겼고, 지금은 그 아들이 소장하고있다.
그런데,
손재형이 일본에서 후지츠카로부터 <세한도>를 받아온 후 그의 연구실이 폭격맞아
그의 모든 소장품이 불타없어졌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이야기인 것 같다.
왜냐하면, 엊그제 과천에서 문을 연 추사박물관이
후지즈카의 아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추사 자료를 기증받아 설립되었기때문이다.
과천은 완당의 마지막과 인연이 있다.
완당은 북청 유배가 끝난후 67세부터 71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청계산 옥녀봉 남쪽자락,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살았고,
이는 지금의 과천 주암동이다.
6월3일 과천에서 추사박물관이 개장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래에 신문기사를 옮긴다.
* * * * * * * * * *
일본서 과천으로 돌아온 '추사의 혼'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선생을 기리는 추사박물관이 다음달 3일 경기 과천에서 문을 연다.
박물관에는 추사 친필 서간문 3종 23통(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4호), 추사가 연구한 금석자료, 필담서 등
진품 유물과 사진, 고서, 서화 등 모두 1만5,000여점이 전시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추사 작품 상당수가 일본으로 유출됐고 국내에 남아있는 몇몇 작품도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현실에서 기초자치단체인 과천시가 박물관을 만들 정도의 작품을
어떻게 구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 국내에서 추사 자료를 수집해 유출한 일본인 학자의 아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