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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 이삼만

일상

by 아이현 2016. 2. 2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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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은

신필(神筆)이라고 불렸던 명필이었지만,

평생 외롭고 쓸쓸한 생애를 살아야했던 사람.


그는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 혼자 열심히 글씨를 써서 익혀,

호남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서예가였는데, 

창암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필첩을 보고 공부하였으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원교를 이어간 제자라 할 수도 있겠다.

원교는 전라도에서 귀양생활을 하면서 결국은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동안 호남인근의 사찰들에서는 그에게서 글을 받아간 데가 많았다.

   

창암이 비록 지방의 빈곤한 명필이지만, 나름대로 호남에서는 알아주는 확고부동의 일인자.

그러나 그가 쓴 붓들은 황모필도 못되고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것. 낙관도장도

돌 도장도 아니고, 나무 도장이나 심지어는 고구마 도장을 마른 인주에 찍은 것도 많았다 전한다.


창암은 동시대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극명하게 비교가 된다.

추사는 왕실의 부마 집안으로 명문 귀족.

그의 명성은 국내뿐 아니라 청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다.

추사는 그야말로 최고의 종이에 최고의 붓들을 사용하였는데,

명필은 붓을 가리지않는다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붓 중의 최고는, 서수필(鼠鬚筆),
그중에서도 큰 배 갑판 밑에서 사는 쥐들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이
최고의 일품 서수필.  부드러움과 강함이 최고로 갖춰져있다고 한다.
왕희지, 추사가 서수필로 글을 썼다한다.

추사 사후 10년, 제자들이 '완당선생전집'을 엮었는데,
전집 권8에, 명필은 붓을 가리지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하면서,
"명필은 붓을 가리지않는다 라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구양순이 <구성궁 예천명>이나 <화도사비>같은 글을 쓸때 정호가 아니면 불가능했던것이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하며, 왕희지도 잠견지에 <난정서>를 자신이 서수필로 썼다고 기록을 남겼다.


창암 이삼만은 새삼 다시 그를 살펴야할 정도의 명필이며, 새롭게 각광받는 인물이다.

그는 정읍에서 태어나 평생 전주에서 살았는데, 첫 이름이 규환(圭煥) 이었으나,

학문이며, 교육을 하는 것, 저술이 늦어 3 가지 모두가 늦으니 스스로 삼만(三晩)으로 개명하였다 .

그는 시,서,화 의 세가지 모두에 빼어난 인물로, 특히 행서와 초서에 뛰어났으며, 궁핍한 속에서도

벼슬과 명리를 멀리하고 글쓰기에 전념하였으며,

지리산 천은사의 <보제루>라는 현판 등, 호남 일대의 많은 사찰에 그의 편액 글씨가 있다.


그의 글씨는 유수체(流水體) 라하여 물흐르듯이 써내려가는 글씨체로,

시골서생답게 꾸밈없고 천진스러운 분위기.

때로 그의 글씨는 뱀의 형상을 한 것들도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뱀에 물려 죽은데서 소년시절부터 창암은 뱀을 보기만하면 죽였다는 이야기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창암의 글은 뱀에 대하여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효험이있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다.




산광수색(山光水色 )




2.

2000년에 출간된 김병종의 <화첩기행 2 >(달이 뜬다 북을 울려라) 에서

'전주' 편은 창암 이삼만에 대한 이야기다.   

김병종이 전주에서 서예가이자 한학자인 작촌 조병희를 만나는데,

작촌은 당시 91세, 전설적인 인물 창암에 대하여 제일 잘 아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작촌의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

"선생이 관직을 가지지도 못했고 돈도 없었던데다 중인이어서 

서울의 후레아들놈들이 글씨를 폄하해버렸지만 하나같이 뼈다구가 살아있는 좋은 것들" 이라고했다.

"거침없는 유수체(流水體), 그것은 글씨며 그림이며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 필무(筆舞)이며,

뱀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신필" 이라고했다.

창암은 병석에 누워있을지라도 하루 천 자의 글을 썼으며,

열 개의 벼루를 맞창냈으며 천 자루의 붓을 몽그라뜨릴만큼 심혈을 기울여 글씨에 매달렸다 전한다.

이는 추사의 글에서도 같은 표현이 있는데, 아마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닐까?


그의 글이 호남일원을 위시해서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있는데,

이는 학동들에게 "체본'으로 글씨를 써서 나눠주었을뿐 아니라

원하는 지인들에게마다 선선히 글을 써주곤했기때문이라 한다.    

 

작촌이 전하는 창암과 추사의 만남은 이러하다.

"선생과 추사의 첫대면은 1840년, 창암의 나이 71세, 추사는 55세.

추사가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전주를 거치게되면서 창암과 '눈물의 상조'를 하게되는데,

이는 평소에 추사가 창암의 명성을 익히 알고있었던 까닭'


작촌이 간직하고있었던 추사 간찰에는 창암에 대하여 찬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다.

추사가 8년만인 1848년 제주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다시 전주에 들렀으나, 창암이 이미 세상을 뜬 이듬해,

추사가 슬픈 마음으로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 란 묘표문을 썼다한다.

김병종이 창암의 산소에 찾아가 추사가 썼다고 전해지는묘표문을 확인한다.







3.

창암과 추사의 만남에 대하여는 전혀 상반된 이설이 존재한다.

지난 블로그 <추사 김정희>에도 올린 바 있지만,

2002년 학고재에서 발행한 유홍준의 <완당평전>1, 2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1840년, 추사의 나이 55세, 그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유배가던중에 두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해남 대흥사에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떼어냈다가 나중에 다시 걸게했던 일화와,

다른 하나는 창암과의 만남이다.

그의 자존심과 고집, 그리고 안하무인의 자부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다.

 

제주에 가던중 전주를 지날때, 추사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을 만났다.

당시 창암은 추사보다 열여섯살이나 더 많은 71세의 노인.

 

창암은 청나라에까지 이름을 날린 추사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했는데,

한참을 침묵하던 추사가 말하길,

"노인장께서는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때 그 자리에 배석해있던 창암의 제자들이 

수모당한 스승을 대신해서 추사를 두들겨팰 작정으로 몰려나가려하자

창암이 말리면서 하는 말,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것 같더라" 

추사의 기고만장과 지방 명필의 만남이다. 


그후 세월이 흘러, 제주도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다시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사를 만난 추사는,

8년동안의 유배생활을 돌이켜보며,

제주도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을 돌이켜볼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한다.

대흥사에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찾아 다시 걸게하였으니,

교만과 독선을 버리고, 인간이 더욱 성숙해지고 겸손해가는 추사 만년의 한 장면이다.

이때 추사의 나이 63세다. 


이어서 전주에 온 추사는

창암을 만나 전에 그의 글씨를 모질게 비판한 것을 사죄하려고 찾았으나,

이미 창암은 3년 전에 죽었다. 

 

창암은 추사를 만난 뒤, 추사의 혹평에 서운해하며,

글씨는 한나라, 위나라의 고전을 원전으로 삼아야지,

진나라 왕희지를 받들면 글씨가 형태만 예뻐지기 쉽다는 이야기를 곧잘 했다 한다.

(아래 행서서도 참고) 

 


 

<이삼만의 행서서도>

 

 

추사는, 이런 순박하고 아름다운 분에게 왜 그랬던가? 후회를 하며, 

죽은 창암의 묘비명 "명필 창암 완산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 와 

아래의 묘문을 썼다고 전한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있으니,

후생들아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유홍준의 후일담은 이러하다.

1998년 여름, 전주에서 '창암 이삼만 유묵전'이 열렸고,

이때 유홍준이 전시회를 보러갔다가, 창암의 묘소를 찾아간다.

창암의 묘소에서 작은 대리석에 '명필 창암 이공삼만지교' 라는 묘표를 읽을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추사의 글씨는 아니었으며, 전설의 묘비문도 씌어있지않았다... 라는 이야기다.




4.

창암과 추사의 만남에서 언급되는 표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필삼십년에 부지자획(操筆三十年 不知字劃) 이라.

이에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추사가 창암의 글을 혹평하면서,

조필삼십년에 부지자획(操筆三十年 不知字劃)이라.

글을 30년이나 썼다는 이가 획 하나 제대로 그을줄 모르는구나, 하면서

그래도 "노인장께서는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창암이 자기의 글을 추사에게 보여주면서,

조필삼십년에 부지자획(操筆三十年 不知字劃)이라,

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자획을 알지 못한다는

겸양의 말이라는 설이 다른 그 하나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다만, 추사와 창암의 만남이 그만큼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들의 만남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할만한 거리였다는 의미로도 보여질수 있겠다.


이에 대하여는, 2014.6.4일자 힌국문학신문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1840년가을, 55세인 추사가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를 지나게 되면서 한벽루에서 창암과 만나게 된다.

    창암에 대한 소문을 들은 추사가 정중히 예를 갖춰 하필을 청하니

    "붓을 잡은 지 30년이 되었으나 자획을 알지 못한다(操筆三十年 不知字劃)” 며 겸손하게 사양했다.

    추사가 다시 간곡히 청하자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어라/

     이 봄 또 객지에서 보내니/ 어느 날에나 고향에 돌아가리

     (江碧鳥/山靑花欲然/今春看又過/何日是歸年)’ 라는 시 구절을 일필휘지했다.

    추사는 이를 보자 과연 소문대로이십니다(名不虛傳)” 이라며 감탄했다.

 

추사가 청나라 선진 문물을 수용했다면 창암은 혹독한 자기 수련으로 공부했다.

추사가 개혁적 유학파였다면, 창암은 조선 고유한 국내파였다.

50세에 규환이라는 이름을 삼만으로 바꾸었다.

삼만(三晩)’은 집이 가난해 글공부를 늦게 하고, 벗을 사귀는 것이 늦어 사회 진출이 늦었고,

장가를 늦게 들어 자손이 늦었다는, 인생에서 중요한 세가지가 늦었다는 의미다 




이하는 자료입니다.


5.

이삼만 탄생 2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2010년 12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있었다.







6.

창암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와 법첩 발간의 서문이 있었다.

아래에 옮긴다.



창암 이삼만 선생 구풍첩 '화려한 부활' 

조인숙씨 국내 첫 법첩책자 발간, 서체연구 귀중한 자료 활용 전망 

손승원기자 / 2008.01.24 (전북일보)

   

정읍 부전동 부무실 출신으로 조선시대 대명필인 암 이삼만 선생(1770∼1847)의 구풍첩(口諷貼)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법첩형태의 책자로 발간돼 우리나라 서예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책자에는 동국진체의 정수인 독특한 '창암체'를 개발한 선생의 생애와 사상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창암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예가로 '창암 이삼만선생 서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지헌 조인숙씨(51)는

최근 도비와 자비를 들여 '창암 이삼만의 구풍첩'을 담은 책자를 발간해 국내서예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창암선생의 작품 가운데 법첩 형태로 제작 출간된 이 책자에는 선생이 64세때인 1833년에,

원교 이광사 선생이 남긴 유묵 서첩 뒷면에 직접 써 내려간 생필 유묵이 그대로 묻어나

국내 서체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총 143쪽으로 이뤄진 이 책자는 '창암 이삼만의 구풍첩을 출간하며'와 '원교 묵적 7점',

'창암 묵적 5점'을 비롯 제1부 원교 이광사 묵첩, 제2부 창암 이삼만의 구풍첩,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집대성한 제3부 창암논고로 구성됐다.

부록으로 '석담'과 '필', '송영을읍', '포슬', '매매시운목목량조', '마제잠두법', '일운무적득필천연',

'부무실', '노예결석 갈기분천', '신독', '월야적벽'등 11개의 창암선생의 작품이 수록돼 서예연구가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조선시대 4대 명필중의 한명으로 추사 김정희선생이 신필이라 추앙했던 창암선생은 교육과 출사, 저술이 늦어져

스스로 三晩이라고 이름을 개명했을만큼 한평생을 서예에만 몰두해 널리 알려지지 않다 최근에 선생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선생의 묵적을 아끼는 서예연구가들은 그를 가리켜

'롱(弄)의 경지에 이른 진정한 자연인'으로 부르고 있다.

광주교대를 졸업하고 원광대 미술대학원에서 서예를, 철학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 인숙씨는

광주MBC와 원음방송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다 결혼과 함께 20여년 넘게 정읍에서 살고 있다.

원광대에 출강중인 조인숙씨는 '창암의 생애와 사상', ' 창암 이삼만 서예술의 도가철학적 고찰',

'원교, 창암 유묵'등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한바 있다. 

 

Copyright 1999-2007 전북일보 All rights reserved.

 


〈저자 조인숙의 서문〉

창암 이삼만의 『口諷貼구풍첩』을 출간하며

 

창암 선생이 태어나신지 올해로 238주년이 되는 해이다. 戊子年 새해 첫날 흰 새벽에 들녘 가득 쌓인

 瑞雪 속에서 이 글을 쓰는 소회를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창암 선생의 여러 묵적을 접하면서, 선생의 書에 대한 애정과 생을 바쳐 연구한 그의 집념, 그리고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자연인으로서 거듭나 그의 몸과 정신·글씨가 하나로 흉합되어

‘서예’ 그 너머의 ‘眞人’으로서의 삶을 遊泳할 수 있었던 그의 먹흔에 傾倒되어,

서예를 즐기는 모든 이들과 함께 창암 서예의 예술성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한 자락

또 더해진다는 희열에 접해서일까?


창암 선생은 조선 후기 서예가로 1770년 9월 28일 현 전라북도 정읍시 부전동 부무실에서 태어나

50세를 전후해서 전주로 이거했다가 1847년 2월 12일 78세를 일기로 전북 완주군 선영에 묻혔다.

그는 어려서부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서예 공부에만 심취하여 여러 문가를 드나들며

많은 유묵첩과 ‘기오이적’의 서법론을 남길 만큼 書學者로서 조예를 다져 나아간다.


청·장년이 되어도 家事보다는 서예 교육에만 열중하여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 없었음에도

서예를 위해서는 가진 것을 다 내놓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 속에서, 자연히 조선의 선비들이

걸어가야 할 일생의 세 가지가 늦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교육·출사(벼슬 대신 교육 사업)·저술이

늦어졌다는 의미로 창암 선생 스스로 ‘三晩’이라 개명한다.(이는 그동안 세간에서 결혼 또는 친교 또는

후사가 늦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처음으로 바로 고쳐 논증함. 실제로 창암은 1789년 18세에 결혼해서

다음 해 19세에 첫아들 순귀를 얻어서 기존의 주장들이 맞지 않은 터에 당시 조선의 선비들이 가야 할

일반적인 세가지가 늦었음을 밝혀내게 됨) 선생은 조선 말기 격동의 세월 속에서 오로지 ‘서예’라는

한 길만을 바라보며 역대 중국서예와 고대 한국서예로부터 조선 선대 서예가들의 진면목을 철저한

연구와 실험정신으로 천착하면서 ‘동국진체’의 정수 ‘창암체’를 개발했다.

조선서예의 ‘창암체로의 승화’는 실로 ‘동국진체’의 확고한 존재를 결정짓는 근거를 마련하므로써

동국진체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한국서예사의 한 ‘양식’을 이룩한 쾌거이다.


이러한 결실을 맺기까지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벼루 세 개가 밑창이 나도록 먹을 갈아

하루에 천 자씩 글씨를 썼고, 후학들을 위해 서예의 古法과 創新을 강조했으며, 자신의 안위보다는

서예 교육의 미래와 후학 교육을 위해, 역대 중국과 조선의 값 비싼 선대 眞籍을 구하기 위해

조선 팔도를 누볐으며, 또한 그것을 목판으로 제작하여 가르쳤고, 가난한 학생에게도 중단 없는 공부 길을

열어주기 위해 붓과 종이 대신 베를 빨아 쓰거나 칡뿌리와 나뭇가지·바위와 모래밭 등 자연의 소재를 한껏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주어 근력 있는 필력을 다져주기도 한다.


그는 언제나 소박함과 겸손함으로 자연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와 변화에서 영감을 얻어 선생만의 독특한

토속적 서예미를 이룩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연과 합일되어 ‘창암체’ 또한

 逸韻無跡得筆天然(일운무적득필천연: 빼어난 소리는 지은 흔적이 없고 득도한 글씨는 자연 그대로이다)의

通靈의 경지에 이른다.


추사 선생은 이러한 창암을 일러 ‘신필’이라 추앙했고 현대에 이르러 그의 묵적을 아끼는 사람들은

서예로서 ‘弄(롱)’의 경지에 이른 진정한 ‘자연인’이라 부른다.

이렇듯 창암 선생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孫이 끊기는 바람에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던 중, 2003년 창암의 생가터가 있는 전라북도 정읍에서

비영리단체인 ‘창암이삼만선생서예술문화진흥회’가 설립되어 창암 선생의 예술혼을 기리고자

2005년부터 매년 ‘창암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동안 분분했던 창암 선생에 대한 자료들이 정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정립되어 이제 그 이론적 틀이

어느 정도 확고히 다져지게 된 셈이다. 앞으로도 계속 선생에 대한 자료가 발굴되어 새롭게 정립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보람으로 여길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창암 선생의 『口諷貼』은 원래 곡성의 아산 조방원 선생이 1960년대 창암 선생님의

묵적을 감상하기 위해 전주에 들렀을 때, 우연히 이 진적을 구하여, 소중히 보괸해 오다가

무려 30여년 만에 세상에 내 놓으신 것이다.

이 서첩은 창암 선생이 64세때인 1833년(癸未年)에 원교 이광사 선생이 남긴 유묵 서첩 뒷면에

창암 선생이 직접 써 내려간 生筆 유묵이다.

따라서 본 책자는 창암 선생의 작품 가운데 최초로 법첩 형태로 제작 출간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연구된 선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해, 앞 부분에는 『口諷貼』의 영인 형태로

원교 선생과 창암 선생의 작품을 싣고, 뒷 부분에 창암 논고 『창암 이삼만의 생애와 사상』·

『창암 이삼만의 도가철학적 고찰 -원교·창암 유묵을 중심으로- 』두 편를 함께 싣게 되었다.

  이 『口諷貼』은 창암 선생이 직접 이름한 것으로, 서첩의 맨 첫 머리에 원교 선생이 ‘口諷牛毛’라고

전서로 적어 나아간 문구 ‘口諷구풍’을 빌어오고 창암 선생이 원교 선생의 뒤를 이어 한지를 덧대어

서첩 뒷면을 채웠다는 의미에서 ‘帖(표제 첩)’ 대신 ‘貼(붙일 첩)’자를 붙여 『口諷貼』이라 부른 것이다.

여기에는 원교 선생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더 값진 것은 두 대가의 글씨를 함께 만날 수 있는 희귀본이라는 점이다.

두 대가는 문장마다 각기 다른 서체로 대화를 나누듯 농익은 필력으로, 서로 다른 개성과 필법으로

보는이들로 하여금 진정한 서예술의 환희를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이 서첩의 원본 크기는 가로 31.3㎝, 세로 42.6㎝, 두께 3㎝로 표지를 제외한 앞뒷면을 합쳐

58면의 병풍식 서첩으로, 펼치면 그 길이가 940㎝에 이른다. 앞면의 원교 선생이 쓴 글씨는

7가지 문장을 각기 다른 서체로 써서 112자이고 창암 선생의 글씨는 발문 53자를 포함하여

5가지 서체로 쓴 110자로써 모두 222자로 이루어져 있다.

『창암 이삼만의 口諷貼』의 법첩 해제는 김익두·류경호,『창암 이삼만 선생 유묵첩』,

정읍시·전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05 / 최준호,『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원교·창암유묵』,

한얼미디어, 2005를 참고하였다.

창암 이삼만의 口諷貼』의 특징은, 기존의 법첩을 사용하면서 느꼈던 애로사항을 다소 완화하는 차원에서

한자의 훈과 뜻풀이를 옆아래로 내려가서 한참 찾아 헤매는 불편을 줄이고자 각 글자마다 바로 옆아래로

내려가서 한참 찾아 헤매는 불편을 줄이고자 각 글자마다. 바로 옆에 달았으며, 통문장의 해석을 모르고

무작정 글자만 익히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그고, 서예의 기예적인 면만 열중하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처음부터 전체 문장을 해석하고 각 단원마다 또 다시 작은 문장을 해석해서 자연스럽게 선인들의 지혜와

서예술을 동시에 心身으로 스며들도록 하였다.

또한 공부하다 잠시 쉬어가는 틈에 창암 선생의 묵적을 감상할 수 있도록 중간 중간에 창암 선생의 작품 11점을

수록하여 흥미를 더하였다.

『口諷貼』이 비단 법첩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나아가 창암선생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위해

'창암 논고'를 삽입하여 창암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위대한 스승 창암 이삼만 선생을 흠모하며 오로지 그를 기리고자 하는 열정만으로 그 깊이를 모르고

선뜻 작업에 뛰어들었으나 그저 부족하기 이를 데 없어 하나 하나 깨우쳐 일러주신다면 후일 더 바른 자세로

공부하여 보답해 올리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2008년  1월   西來山房에서

창암 이삼만 션생 서예술문화진흥회 이사장  曺 仁 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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