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7일 일요일,
오래된 친구들과 부부동반 망년모임이 있다.
1시30분 방배동 친구집으로 병문안,
3시 예술의 전당에서 뮤지컬 <퀴즈쇼> 관람,
그리고 서초동 한정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일정이다.
그런데 나만은 갑자기 내린 눈때문에 <퀴즈쇼> 는 빼먹고
대신 눈속에서 고생하면서 실컷 눈구경을 한 하루였다.
친구 한명이 다리에 깁스를 한채 집에서 요양중이다.
11월 비가 조금 내리던 날,
마이다스에서 골프를 치고 18번홀 그린주변에서 미끄려졌다.
작은 실수가 철심(?) 2개를 심는 대공사로 이어졌다.
방배동 친구집에 모여 잠시 환담을 나누고
저녁식사할 때 다시 만나기로하고 나오는데, 함박눈이 내리고있다.
끊임없이 내리니 차 위의 눈을 치워도 잠시 그 순간뿐이다.
사실 나는 차를 가지고나오는게 번거롭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전 친구가 차 없이 온다는 이야기를 해서 차를 가지고나오게 되었다.
결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전부 차를 가지고 모였다.
방배동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데 눈이 계속 펑펑 쏟아진다.
에술의 전당이 있는 남부순환도로 방향으로 올라가려는데,
이미 차도는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고,
넓은 도로에 차들이 엉거주춤 기어서 간다.
중간쯤까지는 간신히 올라갔는데,
결국은 헛바퀴만 굴리며 더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후륜구동 차가 가지는 치명적인 문제다.
눈길, 오르막에서는 거의 "죽음" 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상황에서 준비없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는 처음이다.
내 앞에서 제네시스도 꼼짝을 못하고있다.
결국 집사람과 친구부인은 차에서 내려 언덕을 걸어서 올라가고
다른 친구에게 전화하여 접선지역을 말해주고 태워가도록했다.
오르막 길은 어차피 틀렸고, 결국은 방향을 바꿔가며 뒤로 서서히 후진하다가
인도쪽에 가서 뒷바퀴를 살그머니 붙여 기대고있다가,
그 턱에 의지하여 전진하면서 크게 유턴하여 언덕을 내려갔다.
그동안 친구들에게는 연락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남부터미널 역 방향으로 가는데 그 자그마한 오르막에서
또다시 후륜구동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다시 유턴하여 지형이 낮은 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낮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결국은 뱅뱅사거리를 지나 간신히 집으로 가서 차를 주차하였다.
입장권을 입구에 맡겨놓겠다고 했고,
김영하의 소설을 좋아하기때문에 그의 원작인 뮤지컬을 보고싶기도했다.
길거리에 차를 팽개치고 공연을 보러갈까하는 생각도 잠시 하기는 했지만,
서울 전체가 차량으로 뒤엉켜 주차장이고 어차피 시간도 늦었다.
게다가 내일 움직여야할 일을 생각하니 포기가 정답이다.
이 상황에서는 차라리 눈 덮힌 거리를 구경하는게 낫겠다.
이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고,
지하철을 타고 느긋하게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예술의 전당 앞 육교를 건너는데
육교 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카메라와 렌즈는 본격적인 프로급이고 복장은 완전 중무장을 한 상태다.
나도 작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계속 퍼붓는 눈때문에 우산을 쓰고 찍으려니 잘 안된다.
육교를 건너 산쪽으로 넘어가니 이미 해 떨어지고 어두운 시간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부부가 있다.
등산복장을 제대로 갖춰입고 헤드랜턴까지 하고 나섰는데
눈 내리는 산, 어두운 시간에 내려오는 모습이 정취가 있어보인다.
불이 켜진 건물 앞은 하얗게 쌓인 눈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다.
불빛까지 부드럽고 은은하다.
혼자 예술의 전당 앞 마당을 걸었다.
얼마전 한국에 출장온 윤환 성님을 만났을 때,
두권의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중 한 권이
김영하의 수필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였다.
책이라면 내가 선물해야하는데 외국에서 출장온 환 성님으로부터
오히려 내가 선물받았으니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었다.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라는 부제와
<Memory Lost> 라는 영어제목이 병기되어있었는데,
<메모리 로스트>가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표현으로 전환된 과정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설명되어있다.
뮤지컬 <퀴즈쇼> 포스터에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21세기 청춘의 위험한 성장기> 라고 소개글이 있다.
거의 끝나갈 무렵 극장 앞으로 가니,
밖에서도 안에서의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무대를 보여주고있다.
화면을 통하여 무대를 보다가 심심해서 사진을 찍으니
직원이 와서 찍을 수 없다고 제지한다.
결국 표 한장으로, 공연의 끝 장면을 밖에서 모니터로 보고 끝났다.
친구들과 다시 합류,
환자인 친구까지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눈은 계속 내린다.
오랫만에 집사람과 함께 눈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소년시절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조블 2010/01/22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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