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수종사(水鐘寺) 와 박석무
1.
북한강을 지나며 수종사 앞을 지나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내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임 수종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매년 새해 첫날 아침에 수종사를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에,
수종사 앞을 지나칠 때마다 항상 그 생각을 떠올리곤 하였다.
요즈음 나는 고전에 새삼 관심이 많아져 최근에는 유 홍준님이
학고재에서 펴낸, 추사 김정희에 대한 글 <완당평전>을 읽고 있는 중인데,
나중에 이에 대한 내 느낌을 써보려 한다.
책을 보다보면 내용도 좋지만 책이 참 예쁘다는 느낌을 가지는 책들이 있는데
<완당평전>이 그러하다. 인생살이 살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삶의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옛사람의 삶에 대한 글을 읽으면
느껴지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품격이 또한 그윽하다.
며칠 전 <다산연구소>의 박 석무님으로부터, 다산에 관련된
<초겨울 수종사(水鐘寺)>라는 글을 받았다.
박 석무님에 대하여 아는 바 없어 내심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니 <조용헌 살롱>에 박 석무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에
그 글과 <초겨울 수종사(水鐘寺)>를 올린다.
2.
초겨울 수종사(水鐘寺)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의 옛 생가에서 가장 가까운 절로 수종사가 유명합니다.
어린 시절에서 노경에 이르기까지 틈이 나면 찾아가서 즐겼던 곳이 수종사여서,
다산의 시에는 수종사가 자주 등장하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거론됩니다.
“수종산은 옛날에 나의 정원으로 여겼기에, 생각만 나면 훌쩍 가서 절 문에 당도했네”
(水鍾山昔作吾園 意到翩然卽寺門)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 다산이
자기 집안의 정원으로 여길 만큼 가깝게 여기던 곳이 수종사였습니다.
그런 수종사였건만 나이가 많아 산에 올라갈 수 없는 형편에 이르자,
그 안타까움을 시로 읊었습니다.
수종산의 저녁 빛은 찡그린 얼굴 모습
눈꽃 핀 나무와 얼음 샘이 초조하게 사람 기다리네.
고갯마루에 까마귀 날자 그때야 말채찍 가다듬고
역사(驛舍)에 닭 울자 벌써 수레바퀴 기름치네.
북쪽 산굽이 일천 자락을 붙잡고 올라
동쪽 봉우리 만가마 티끌 깨끗이 씻고 싶어라.
이러한 풍류놀이에 뒤따르기 어려워
백발의 노인 시 읊으며 바라보니 마음만 아프네.
水鍾山色暮如顰 雪樹氷泉悄待人
嶺路鴉翻初振策 驛亭鷄唱已膏輪
思攀北崦千回磴 淨洗東華萬斛塵
如此風流難附尾 白頭吟望黯傷神
당시 다산의 나이는 70세였습니다.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이며 39세이던
해거도위(海居都尉) 홍현주(洪顯周)가 친구들과 함께 그를 찾아와 운길산의 수종사에
오르자고 했으나 함께 가지 못하는 늙은이의 서러움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의 제목은 “임금의 사위께서 수종사로 놀러가자 했으나 내가 늙어서
따라가지 못함(都尉將游水鍾寺 余老不能從)”이라 했습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비록 복권되지 않아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학문과 인품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당대의 명사들이 두릉(杜陵)까지 자주 찾아왔습니다.
인생과 학문을 논하고 역사와 세상을 논하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노년의 삶을 여유롭게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많아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되자 그 심정을 읊은 시는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박석무 드림
3.
[조용헌 살롱] 茶山硏究所와 박석무
조용헌 역사평론가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5.12.11 21:58 52'
▲ 조용헌·역사평론가
나는 호남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지만, 왠지 모르게 유풍(儒風)의 고장 안동에만 가면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안동의 유서 깊은 선비 집안에 출입하면서 안동 양반들과 인맥이 있는
전라도 사람을 꼽는다면 시니어 그룹에서는 박석무(朴錫武·64) 선생이 있고,
주니어 그룹에서는 필자 같은 사람도 포함된다.
박석무는 80년대에 국회의원도 두 번 지낸 바 있지만, 다산(茶山) 전문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가 정약용의 편지글을 소개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문과 고전 그리고
호남의 선비 집안 족보에 대해서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다.
조선의 선비문화와 고전을 화제 삼아 적어도 2박 3일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한문을 천착하게 된 계기는 감옥 출입이었다.
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세 차례나 감옥을 들락거렸고,
출소 이후에는 광주 충장로 귀퉁이에다 4평짜리 사무실을 차려놓고 한문번역을 하였다.
호구지책으로 호남 여러 집안들의 문집 번역에 몰두하면서
한문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호남 선비 집안의 학맥과 혼맥이 어떻게 얽혀 있는가,
그리고 주요한 인물들의 문집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꿰게 되었다.
조선시대 호남의 학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알려면 그를 통해야 한다.
양반문화를 이해하려면 필수과목 중의 하나가 바로 ‘보학(譜學)’인데,
그는 보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가 박석무 선생에게 붙인 별명이
‘호남의 대제학’이다. ‘건달의 꽃’(?)인 국회의원도 해 봤기 때문에 사판(事判) 경험도 있고,
고전과 한문이라고 하는 이판(理判) 세계에 대한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므로 대제학 자격이 충분하다.
그가 운영하는 다산연구소에서 대권 후보인 고건에게 우민(又民)이라는 호를
붙여준 바 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다산연구소가 고건의 싱크 탱크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는데, 며칠 전에 박석무 이사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정치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호남의 대제학으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블 2005/12/1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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