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오의 법칙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친구가 며칠 전 물어봤던 이 법칙을 잠시 생각해 본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간명한 법(法)이 있을까?
그런데 응징(膺懲)과 등가(等價)의 기본원리를 가지고 있는 이 법(法)이,
오늘날 야만의 법칙인 양 느끼도록 흔히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치 암흑가의 그 것 인양, 그리고 타파되어야 할 법칙처럼.
<눈>을 공격한 자에게 <눈>을 응징하는 것은, 등가의 것을 응징함으로써
복수하고 이를 통하여 유사한 사례를 예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충분한가? 또는 잘못된 것인가?
<눈>을 처음에 공격당한 자는 그러한 공격을 당해야하는 잘못이나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눈>을 파괴당했다. 그러나 <눈>을 공격한 자에게는 그의 <눈>이
나중에 응징당해야 할 만한 충분한, 혹은 최소한의 이유가 있다.
그러면 처음에 이유도 없이 공격당한 자에게 이 법칙은, 오히려, 얼마나
억울하고 불공평한가? 내 <눈>이 이유 없이 공격당해 파괴되었는데
그 보상은 어디서 받을 것인가?
공격자의 <눈>이 나중에 파괴된다고 해서 내 <눈>은 보상을 받은 것인가?
그리고 또 공격자가 만약 장님이라 <눈>이 없다면, 나중에 무엇을 응징해줄 것인가?
어떠한 경우에도 보상되지 않고 또 충분하지도 않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응징하는 것마저도 억제하려는 것이 소위
철학적인 또는 교화적인 인도주의 입장이다. 인간은 충분히 반성할 수 있는
자질이 있으므로 한 때의 잘못을 <탈리오의 법칙>으로 처벌하지 말자는 것이다.
법에서는 응징과 복수의 논리를 마치 인간의 퇴화된 엉덩이 뼈 정도로만 생각한다.
초창기 법은 너무나 간명하였다.
수개의 법규만으로도 세상이 규제되었다.
성경은 열 개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한 경구를 주었다.
그 열 개도 우리가 따르기에는 힘이 들지만.
이제는 점차 법이 복잡해졌다.
절도죄의 대상은 원래 타인의 재물을 훔친 자 인데, 나중에 유체물(有體物)이
아닌 전기(電氣)를 훔치는 자까지 처벌하려다보니 그 규정이 바뀌거나 혹은
해석이 바뀌어져야했다.
그리고 이제 법이 복잡해져서 일반인들이 잘 모르다보니 법을 아는 자들이
저들만의 논리로 법을 농단한다.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은 또 무언가?
일반 사항이 아닌,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검찰총장만을 지휘한다.
법에 그리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 검찰총장을 지휘했다, 뭐 잘못 됐냐?
모르는 자가 잘못하면, 가르치면 된다.
그러나 아는 자가 그리할 때는 가중의 비난이 타당하리.
모든 법에는 그 법률이 가지고 있는 연혁적(沿革的) 이유가 있고, 또 해석할 때
따라야하는 합목적성(合目的性)의 원칙이 있다.
이미 법률에 있어 자연법론(自然法論)과 실증법론(實證法論)의 큰 줄기에서,
합목적성을 따지고 천부인권(天賦人權)의 역사적 배경을 조명하여야하는 자연법론이
대세를 이루고 이를 누구도 부정 못하는데,
얄팍한 논리 구조를 가지고 국민에게 허위의 지식을 강론하고 또 이에 부화뇌동하는
식자(識者)들이 있다. 내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성경을 읽음을 빙자하여
촛불을 훔치는 자>에게도, 서 푼의 논리는 있는 법.
- 다리 위를 마차는 지나갈 수 없다.
무거운 마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지기 때문에, 다리를 보호하려고 이 법을
만들었다. 그 때는 마차가 제일 무거웠다.
그런데, 마차보다 더 무거운 자동차가 나타났다.
자동차는 지나갈 수 있는가?
법규의 단어만을 고집스럽게 그대로 해석해서, 지나갈 수 있다 하면, 이는 곧
실증법적 해석이다.
왜 이 법이 만들어졌는지 합목적적으로 해석해서 그 취지를 살펴, 자동차가
지나갈 수 없다고 해석하면, 이것이 자연법론의 한 가닥이다.
그런데, 자동차를 예컨대 사람에 그 외연(外延)을 확대하여, 그러면 자동차를
운전하는 자의 인권(人權)은 어쩌란 말이냐? 하고 벌 떼같이 일어나 외치는
자들이 있다.
다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 법을 만들었으니 다리를 보호하는 것이, 이 법이
궁극적으로 보호(保護)하고자 하는 이익(利益)인데, 이제 자동차 운전자의 인권을
보호하자며, 결과적으로는 다리를 부수겠다고 덤비면,
자, 누가 옳은가?
다시 <탈리오의 법칙>을 이야기 하자면,
많은 다른 이론들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는 법정의(法正義)에 맞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설(說)은 다수설이 아니다.
그러면, 다리를 부수겠다는 자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서지고난 후에 그 때서야 뒤늦게 이 법칙을 생각해 낼 것인가?
- 지금 강의하냐?
- 아뇨.....
- 그럼 뭐하는 건데?
- 그냥...
- 너, 법을 좀 아냐?
- 아니, 의금부(義禁府)에.....
- 니가 거기서 일한다고?
- 아니,,, 끌려 다니면서,, 쪼그려 뛰기만 쫌 했어,
- 근데, 왜 떠들어?
- 얼마 전에 우리 성님이 물어봤던 게, 갑자기 생각나서.....
- 니 성님 스타이루 따라하냐?
- 우리 성님이, 좋은건 항상 따라 배우라캐서....
- 니 성? 벌써 잊어버렸어.
- 엉? 나, 그럼 지금 <뒷북>친 거야?
- 답을 꼭 들어야 아냐? <아이>가 <현>명하지 못하고 어리석기는.....
*조블 2005/11/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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