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저녁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12시 다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집사람이
고암(古岩)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한다.
아니 운숙이 아저씨가?
나에게는 어릴적부터 운숙이 아저씨가 더 익숙하다.
두달 전 어머님 산수연(傘壽宴)에서 부모님 고향어른들 뵐때도
그 자리에 참석하신 아저씨께 인사를 드렸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다음날 오전에 영안실을 찾았다.
아산병원에서 복수로 가득찬 배에서 물을 빼고, 더이상 수단이 없어 집으로
돌아오신 것이 5월 14일이니 20여일을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다.
아주머니께서는, 아저씨가 병원에서 돌아오신후 통증으로 아파하셨는데
이제 돌아가셨으니 지금은 편하게 계시겠지요, 하신다.
육신을 벗으시니 가벼워지신 건가요.
지난번 우리 어머님 산수연(傘壽宴)때 나들이가 마지막 나들이었다고 한다.
향을 피우며 영정을 보니 아저씨 젊으셨을적 사진이다.
흑백사진인데 옛날 영화 포스타의 최무룡과 신성일은 저리가라 다.
아주머니께서 아저씨 친구분들과 함께 이야기 하신다, 영정사진 찾으면서
이 양반 인물이 이리 좋은지는 다시 한번 알았지요.
남아있는 자식은 딸만 여섯이다.
영정사진 옆에 아저씨의 약력이 간단히 쓰여져있다.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시고
함흥 영생고보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4학년 재학중 입대.....
..........
이제 여든 둘의 연세에 돌아가셨다.
아저씨께서는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 집으로 불러 영어참고서를 사주시고
영어를 공부하는 기본에 대하여 말씀해주셨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면 아주 옛날인데 그당시 아저씨 연배의 사람들중에서
영어를 가르쳐준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인물이 준수하고 키와 체격도 헌헌장부의 모습이셨다.
유도를 하여 공인 4단이었으며, 나중에는 서예에 심취하여
국전에서도 상을 여러번 타셨고 초대작가가 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몸소 비문을 써주시고, 내게도 여러번 글을 써주셨다.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생이 누구하나 기구하고 파란만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겠지만, 아저씨의 삶도 일제시대와 6.25전쟁, 그리고 그 후의 역사에서
살면서 평탄한 삶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해방후 함흥을 떠나 서울 중구 필동집의 아버님을 찾아오셨고,
이후 필동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살면서 대학에 다니셨다.
아버님과는 피가 섞인 친척은 아니셨지만 평생 아버님을 형님으로 모셨다.
영생고보가 수재들이 다니는 학교며 아저씨가 엄청난 수재였다고 아버님께서는
여러번 말씀하셨다.
학교를 다니다 전쟁이 나자 아저씨는 군에 입대하였다.
그후 제주도에 폭동이 일어나 공비토벌부대로 제주도에 내려가셨는데,
거기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곤 얼마후 제주를 떠났는데, 제주도에서 만났던 여인은 아저씨를 못잊고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운명이 그리되느라 그랬는지 드디어는 아저씨의 딸을 낳았고, 혼자
살수없게된 여인은 나중에 그 딸 영희를 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그러나 그때 벌써 아저씨는 하숙하던 집 딸과 사랑에 빠졌는데, 이때부터
영희엄마의 슬픔이 시작된다. 아저씨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엄청났던 것 같다.
그러나 끝내 영희엄마는 아저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이 무일푼의 버림받은
여자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곧 엄청난 부를 일궈내고야만다.
버림받은 슬픔과 고통이 이 여인을 강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슬픈 드라마의 초창기때 우리 집안에선 대체로 영희엄마 편을 들었던 것 같다.
영희엄마는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아주 잘 했다.
돌아서버린 아저씨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수단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나중 이야기이지만, 영희는 내 누이동생들과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아저씨는 영희엄마에게 끝까지 냉정하게 대했다.
내 어릴 적, 아저씨와 아버님이 말씀을 나누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아니 형님, 그 여자가 말이요.....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들.
무슨 연유와 이야기가 있겠지만, 남녀간의 이야기는 정말로 남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영희엄마가 큰 재산의 부를 일궈내는 동안, 하숙집 딸은
아저씨와 결혼하여, 딸만 여섯을 내리 낳는 부를 일궈낸다. 딸부자라는 이야기도
있지않은가. 그리곤 끝내 아들을 보시지는 못했다.
옛날 영희엄마가, 아니 그래 어째 그리 딸만 낳는다니... 하며 눈을 예쁘게 흘기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자신이라면 아들을 낳아줄 수 있는데 하는 그런 표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심에 얼마나 큰 고통과 질투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을까.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아저씨를 영희엄마가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영안실에 가니 문득 영희엄마에게 연락이 갔나 궁금해졌다.
아마도 갔겠지만, 그러나 물어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희엄마는 아저씨를 평생 미워하였지만, 남몰래 슬픔과 사랑에 눈물을 많이
흘리셨을거라 생각든다.
영희엄마는 평생을 딸 하나 키우고 홀로 살았다.
그러나 이제 육신은 늙었고 지나간 세월, 청춘을 돌이킬 수 없으니 아저씨의 죽음을
맞이하여 슬픔과 원망, 아쉬움이 얼마나 크고 안타까우실까.
여러가지 잊혀져있던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문득 인간만사 사람사는 모습과 삶,
세월의 무상함이 모두 덧없다.
집에 돌아와 거실에 액자로 만들어놓은 글을 본다. 아저씨께서 써주신 글이다.
숭덕광업(崇德廣業)
덕을 숭상하고 쌓아 일을 크게 하라......
육신을 벗고 훌훌 떠나가신 아저씨,
이제는 평안하시기를 마음으로 빕니다.
*조블 2007/06/07 08:10
| 어느 내기 골퍼의 최후..<1> (0) | 2016.01.02 |
|---|---|
| 조블에서 네이버로 포스트 옮기기 (0) | 2016.01.02 |
| 골프장에서 - 아시아나, 그리고 제주 (0) | 2016.01.02 |
| 청평에서 워크샵 (0) | 2016.01.02 |
| [스]프랑스 와인, 또 미국에 졌다 (비공개) (0) | 2016.01.02 |